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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필통

120421 비오는 날의 잡생각

오늘은 참 글쓰기 좋은 날이다.

일이 없는 토요일인데다 꼭 가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제법 기운 센 봄비가 온 마을을 적시고 있기 때문이다.

일과 외출의 부담을 떨쳐냈으니

차분하게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글이나 써야 겠다.

 

나들이를 계획했던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이 빗발치는 대공원 길.

한적해서 오히려 난 좋다.

우산을 받쳐 들고

빗물 흥건한 황톳길을 골라 밟으며 천천히 걷는 즐거움.

비둘기는 벚나무 가지에 앉아 그윽하게 울고

흐드러진 벚꽃은 봄비를 머금고 배시시 웃는다.

시쳇말로 분위기 쥑인다.

무릇 시인이라면 흥에 겨워 시 한 수 읊조릴만하다.

그만한 실력이 없는 나로서는 그냥 중얼대는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향해 나긋나긋 고백하기도 하고

잘 들어줄 것 같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조근조근 내 사정을 털어놓기도 한다.

 

야외음악당과 잔디마당에서

중고등부 과학문화축전이 열리는 모양이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잔디마당 천막촌으로 들어간다.

순간 비바람이 몰아쳐 천막이 심하게 우쭐거리더니

그 지붕은 고였던 물을 와락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다.

"끼야아악!"

얇은 봄 치마를 입은 여선생은 황급히 치맛단을 내린다.

 

관모산 계곡의 도랑이 제법 물을 불렸다.

거기 오리 한 쌍이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상류 쪽으로 헤엄을 친다.

"녀석은 요즘 하루에 몇 번쯤 암컷의 등위에 올라탈까?"

한창 짝짓기 할 때가 아닌가.

"동물 중에서 가장 바람을 많이 피우는 동물이 조류라던데

녀석도 다른 암컷을 탐하고 있을까?"

(약간의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는 문장이라 지울까하다 그냥 놔둔다.

내 마음을 표현한 것은 절대 아니다.)

 

이것저것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이 바뀐다.

사람은 하루에 오만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오만가지 잡생각.

그 잡생각의 대부분이 걱정이나 근심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

내 나이 오십을 넘겼으니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걱정,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근심일 듯하지만

아직 머리는 많이 녹슬지 않았고

마음은 그 절반 이상이 여전히 파릇파릇하다.

이미 지나간 잡생각은 어쩔 수 없다 치고

글로 쓸 수 있는 잡생각은 어떤 게 있을까?

글로 옮겨 적는 생각이 과연 잡생각일 수 있을까?

뭐 그냥 술렁술렁 거리낌 없이 써 내려 간다면

잡생각을 글로 표현 할 수도 있겠지...

 

우선 고향집이 생각난다.

고향생각이라면 어린 시절 얘기다.

비가 와도 우린 뛰어 놀아야 했다.

안방 건넌방 장롱 다락방 가리지 않고 숨어야 했고

툇마루 봉당 부엌 외양간 비를 피해가며 우당탕 퉁탕 달려야 했다.

아부지가 계실 땐 엄두도 못냈지만

엄마만 있을 땐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뛰었다.

"녀석들아, 작작 좀 뛰어라. 구들짱 빠진다."

그 해 겨울,

아부진 구들장이 내려 앉아 시커멓게 그을린 장판을 가리키며

형과 나를 벌 세웠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 끝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빗물을

손바닥에 가득 채워 담기도 했다.

노래를 흥얼대거나 하염없이 잡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너 이 녀석, 낙숫물에 손 맞으면 사마귀 생긴다고 했어 안했어!"

엄마가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면서 소리를 냅다 지른다.

에고, 들켰구나.

"후다닥!"

 

넙데데하고 길죽한 돌들이 처마 아래 가지런히 놓여 있다.

돌들 안쪽으로는 툇마루를 따라 좁다랗게 봉당이 이어지고

돌 아래로 한 발짝 내려서면 저 만치 울타리가 있는 데 까지 안마당이 펼쳐진다.

그런데 봄비가 서너차례 내리더니

봉당 돌들 바깥쪽으로 가느다란 점선이 생겼다.

나는 그 점선을 한동안 참 무던히도 좋아했다.

낙숫물에 이마를 씻고 마치 반상회라도 하는 듯

작은 돌들이 쪼르라니 놓여 있던 줄.

낙숫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때 마다 물동그라미를 하나 둘 가뒀던 작은 물동이가

나는 참으로 신기했다. 

비가 오면 그 줄을 따라 빗물이 물줄기를 이루고

그 물줄기가 뒤꼍을 돌아 도랑으로 흘렀다.

개울에 나갈 때마다 작고 이쁜 차돌이나 곱돌을 줏었다.

하루 이틀 그 점선이 뚜렷해지는 것을 보면서 배시시 웃었던 적이 있다.

아무래도 비오는 날엔 배시시 웃는 게 어울릴 것 같다.

 

비가 내릴 때 나는 소리와 냄새.

고향집 마루에서 낮잠에 빠져들 즈음 들었던 낙숫물 소리와

텃밭에서 봄바람에 실려 온 두엄 냄새가

내 머리와 마음속에 각인돼 있는 빗소리와 냄새다.

때로는 강아지가 빈 양철그릇 핥는 소리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종소리 처럼 들리기도 하는 낙숫물 소리.

오늘은 그 소리가 그립다.

쇠똥 냄새, 풀 썪은 냄새, 거기에다 흙냄새와 비냄새 까지.

툇마루에 앉아 돌담을 넘어 봄비 내리는 밤벌께를 내다 보면

그 오묘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고향 떠나 도회지 생활에 젖고 나서부터는

머리나 마음에 각인 될 만큼 좋은 소리, 저릿한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고나 할까?

그 만큼 감수성과 심미안이 무뎌딘 탓도 있을 터이다.

 

본 것보다는 들은 것이,

들은 것 보다는 냄새 맡은 것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연구 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올해 초, 설을 맞아 청평의 큰형 집에서 하루 밤 묵을 때였다.

만둣국을 먹고 막걸리를 한잔 걸친 채 약간 취한 상태에서

막 잠자리에 누웠는데...

"바시락 바시락...우당탕 퉁탕..."

이게 왠 소리인가?

실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정말 반가운 소리였다.

"바드득 바드득..."

집쥐가 천장 위를 뛰어 다니며 석가래를 갉아대는 소리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언젠가는 하루도 빠짐없이 늘 듣던 소리였다.

이 소리에 놀라 한번은 맨발로 냅다 뛰어 마실간 엄마를 찾아갔었지.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큰형이 빗자루로 천장을 냅다 후려치며

"이놈의 쥐새끼, 저리 가지 못해! 시끄러워 잠을 못자겠네!"하셨다.

소리가 뚝 끊겼다.

사방이 쥐죽은 듯 다시 고요해졌지만

그 반가운 소리를 한번 더 듣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난 요즘 소리나 냄새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소리나 냄새를 보여 줄 수는 없을까?

자연의 소리나 냄새를 악보나 문자로 표시할 방법은 없나?

풀벌레 소리나 새 소리를 엮어서 교향곡을 만들고 싶고

냄새를 풍겨서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 센터를 만들고 싶다.

소리 백과사전, 냄새 백과사전, 영상 소리도감

뭐, 그런 것들을 만들고 싶다.

 

"빨리 오셔!"

이심전심, 맘씨고운 아내가 김치전을 부쳐 놓고

빨리 안온다고 성화를 부린다.

"막걸리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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