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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 일기

110121 눈 내리는 창가에서

일요일이지만 세금 낼 걱정이 돼서
당산동 사무실에 나왔다.
부가가치세 신고 마감일이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행과 완행전철이 동시에 왔지만
송내역에서 완행전철을 탔다.
지난해 소천하신 법정스님이 쓰신 책,
오두막편지를 읽으면서 당산역에 내렸다.
출구 계단을 내려오다 보니

눈발이 제법 굵다.
출구에 들어선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고
옷깃에 내린 눈가루를 툭툭 턴다.
왼쪽 구석에는 거렁뱅이 아저씨가
요 며칠 꿈쩍않고 앉아있다.
동냥 바구니엔 동전대신 빈 눈만 쌓인다.
하지만 은행앞은 분주하다.

노점 아저씨가 과일 좌판에 비닐을 덮느라

허둥지둥 이리뛰고 저리 뛰고...
그 옆에는 과자트럭이 서있는데
짐칸에 생과자가 하나 가득하다.
과자점 아저씨,

일요일에 눈까지 온다며 한숨을 내쉰다.
생과자 두 봉지를 샀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출근할 때면
늘 이렇게 노점에서 먹을 것을 산다.
어떤 날은 녹차호떡, 
어떤 날은 군고구마...

눈발은 더욱 굵어졌다.
빈 포장마차의 처마밑에서 사람들은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다.
초록불 아래로 눈가루들이 춤을 추며 나린다.
길을 건너면서 내 사무실을 흘끗 올려다 본다.

불이 꺼져 있는 걸 보니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데다
구제역이다 조류독감이다 어수선한 요즘이니
일요일 출근이 내키지는 않을 터이다.
때마침 빗자루를 들고 나서는 경비 할아버지께
생과자 한 봉지를 내밀었다.
"밤에 출출할 때 심심풀이로 드세요."
4층짜리 우리 건물은 할아버지 두 분이 교대로 경비를 서시는데
오늘 당번은 올해초 부임한 안경잡이 할아버지다.
"나중에 손주나 가져다 주시든지..."
이가 성치 않다며 사양하시는 걸 기어이 드렸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창틀에 얹혀있는 티백을 더듬거리다.
보리차를 마실까. 메밀차가 나을까.
아님 둥글레차를 오랜만에 마셔볼까?
보리차를 따끈하게 한 잔 타가지고
창가에 섰다.
지난 연말에 장식한 포인세티아가 
화분에 나지막하게 꽂혀 있다.
창밖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포인세티아의 붉은 빛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빨간 포인세티아가 나지막히 깔려있는
네모난 하얀 창가.

내가 화가였다면

당장 수채화 물감을 짜들고 나설 것 같다.
디지털 카메라라도 가져올껄...

우산이 없는 연인들은
이 참에 바짝 껴안고 함박눈을 즐긴다.
하지만 갈 길 바쁜 길손들은
흘끔거리며 종종걸음을 친다.
길 바닥이 금새 하얗게 변했다.
건널목을 향해 뛰는 사람.

비닐봉투를 들고 장을 봐오는 아주머니.
한참을 서성대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람...
맞은 편 식당앞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촘촘해 졌다.
식재료를 싣고 들어가는 트럭에 매달려
기다란 바퀴자국이 쫄래쫄래 따라간다.
떡볶이 집 주인이 넉가래를 밀고 나왔다.
가게 앞을 한차례씩 오갈 때마다
하얀 색 여백이 검정색으로 바뀐다.
마치 어떤 서예가가
깨끗한 한지에다 붓글씨를 쓰듯이
검은 줄이 한올 한올 마당에 새겨진다.
현정이는 뭐하고 있을까?

어이쿠! 보리차 다 마셨네.
세금계산서 챙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