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나도 갈래."
여동생이 냉큼 따라 나섭니다.
"넌 기냥 집에 있어, 철뚝길 위험하단 말야."
하지만 이미 동생은 내 허리춤을 단단히 부여잡았습니다.
"안 데꼬 가믄 이따 맛있는 비스케또 안줄껴!"
"좋아 그럼, 비스케똔 내 꺼다."
동생의 손을 잡고 마중을 나갑니다.
"빨리 가자. 아마도 지금 쯤 청평역을 지났을 꺼야."
알록달록 곱게 차려있는 동네 누나들이
상색역에 내리는 모습이 삼삼하게 그려집니다.
윤이에 늦밤나무 밑을 지나
용이네 앞마당을 막 지나쳤을 때,
"우왁!"
"엄마야!"
장난꾸러기 용이 녀석이 돌담밑에서 불쑥 나타나 우리 남매를 놀래킵니다.
"어디 가냐?"
"성들 오나 마중나간다. 왜?"
"그래? 나도 이모 마중 가는 중인데..."
짖굳기는 하지만 좋은 길동무가 생겼습니다.
어쩜 용이 이모한테 풍선껌을 하나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용이 이모는 작년까지만해도 읍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는데요.
방학때면 동네 얼음 논에 나와서
발 스케이트를 타곤 했지요.
피겨라나 뭐라나.
그 왜 스케이트 앞날이 두리뭉실한 거 있잖아요.
이모는 그 걸 타면서 얼음판에서 빙글빙글 돌고 폴짝 폴짝 뛰고...
"우와 마치 선녀 같네..."
하지만 이모는 서너 달 전,
서울에 직장을 얻어 동네를 떠났습니다.
그 때도 용이와 함께 상색역까지 배웅을 나갔었는데요.
"학교에 잘 다녀라. 장난꾸러기들아"
볼타구니를 살짝 꼬집으며 이모가 말했습니다.
"맨날 싸우지만 말고 공부도 일등 쫌 해 봐라."
이모는 풍선껌 두 개를 꺼내 주곤 기차에 올랐습니다.
"뵈엑 뵉!"
기차는 개미데미쪽으로 긴 꼬리를 감춥니다.
"짠! 뭘 그렇게 생각하냐?"
용이 녀석이 반쯤 감겨 있던 내 눈앞에
기다란 대못을 내밀었습니다.
"나, 이걸로 칼 만들꺼다."
"이야, 정말 길다. 어디 좀 보자."
요즘 우리 반에선 못으로 손칼을 만드는 게 유행입니다.
"이 거면 우리 반에서 최고 길 꺼 같은데."
"아냐, 전교에서 짱일꺼야."
기다란 대못을 구할 수 있는 용이가 마냥 부럽습니다.
"너, 울 아버지 한테 말하면 안된다."
용이 아버진 읍내에서도 알아주는 대목장.
용이네 창고엔 늘 못주머니와 먹물통 같은 게 널려 있지요.
"알았어, 대신 못 한 개만 바쳐라."
용이 녀석은 이번에도 제법 큼지막한 못을 하나 주머니에서 꺼냅니다.
"너 니까 준다. 다른 애들은 어림도 없는데..."
철뚝에 올라 서자마자
철로에 엎드려 귀를 철쇠에 가져다 댑니다.
이렇게 하면 먼데서 다가오는 기차소릴 들을 수 있거든요.
"뚝딱 뚝딱..."
아주 희미하긴 하지만
철쇠에서 뭔가 소리가 들립니다.
"이게 뭔 소리지?"
"글쎄말이야. 기차소린 아닌 거 같은데.."
어쨓든 철쇠에다 못을 올려 놓고 침을 퇘 뱉은 다음,
못을 이리저리 굴려 봅니다.
뭐하는 짓이냐고요?
이래야만 못이 떨어지지 않고 기차가 지날 때까지 철쇠에 붙어 있거든요.
물론 기차가 지나간 뒤에는 못이 납작해지고요.
그 납작해진 못을 숯돌에 갈면 마침내 손칼이 완성됩니다.
여자 애들 고무줄을 끊거나 책상에 꼰지리 판을 만들 때 아주 요긴하지요.
"철거덕, 철거덕..."
그런데 저 아래 칠학골 쪽에서 뭔가가 다가오네요.
"야, 고부꾼 온다. 빨리 숨어!"
동생의 손을 낚아 채고는 잽싸게 철뚝 경사로에 엎드립니다.
코스모스 그늘 아래 납작 엎드린 채,
고부꾼들이 얼른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고부꾼은 철로를 점검하러 다니는 일꾼들인데요.
큼지막한 쇠망치를 메고 다니면서
침목에서 삐져 나온 철못을 두드려 박곤 하지요.
그리고 가끔씩은 저렇게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작은 손수레를 타고 다닙니다.
"네? 허리는 왜 굽신대느냐구요?"
손수레 가운데 달려있는 지렛대를 올렸다 내렸다 해야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야만 손수레가 움직이거든요.
어떤 때는 고부꾼들이 지렛대 양쪽 끄트머리를 잡고
번갈아가며 굽신대는 데요.
그 속도가 빠를 수록 손수레의 속도도 빨라진답니다.
오늘은 아주 느릿느릿하게 손수레가 다가옵니다.
"아까, 어떤 꼬맹이들이 이쯤에서 얼쩡댔는데..."
"아이쿠, 들켰나보다."
코 긑을 풀밭에 쳐박고 싸리나무 아래로 더 납작하게 몸을 숨겼지만...
"야, 거기 노란 우와기 입은 놈, 다 보이니깐 빨리 나와라."
"으앙~"
여동생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거 봐라, 오빠가 넌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놈들 누가 철길로 다니라고 했어, 응~"
세명의 고부꾼 중에 얼굴에 주름이 가장 많은 아저씨가 우리를 윽박지릅니다.
하지만 평소에 생각했던 우악스럽고 험상 굳은 얼굴이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 같은 얼굴입니다.
"이리와서 타라."
"아저씨, 잘못했어요. 다시는 철길로 안 다닐께요."
동생과 난 손을 싹싹 비볐습니다.
"알았어, 이 놈들아. 안 잡아갈테니 걱정 말고 여기 타라."
주름 많은 아저씨가 동생을 안아서 수레에 태웠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도망칠까?"
하지만 동생을 놔두고 나만 도망칠 수 없는 일...
와글거리는 자갈더미를 밟고 손수레에 올랐습니다.
"니들 상색역에 가는 중이지?"
"네, 6시반 차로 성들이 오거든요."
"6시반 차라...아직도 30분이나 남았는 걸..."
아저씬 손수건을 꺼내 동생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아저씨가 역까지 태워다 줄테니까 앞으론 철길로 다니지 말거래이."
"철커덕, 철커덕..."
아저씨들이 굽신 댈 때마다 손수레는 두어 걸음씩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고보니 용이 녀석은 잽싸게 도망치고 없네요.
"괘씸한 놈, 우릴 내팽겨치고 저 혼자만 줄행랑을 치다니..."
"뜸북, 뜸북, 뜸뜸뜸뜸뜸...."
연가리 들녘에선 뜸북새가 울고,
개미데미 산기슭에선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이마에 맺혔던 식은 땀이 슬그머니 잦아 들더니
코 끝으로 코스모스 향기가 스칩니다.
지난 여름, 우리 애향단이 철길가에 심은 코스모스.
그 머리 맡엔 저녁 놀이 걸렸구요.
그 발치에선 귀뚜라미가 합창 연습을 합니다.
"또르 또르 또르르...."
고부꾼 손수레는 금방 상색역에 도착합니다.
역이라고 해 봤자
허름한 송판 건물에다 희끄므리한 역 표지판이 전부입니다.
역무원도 신호등도 없습니다.
"벌태봉역?"
역표지판에 누군가가 낙서를 했네요.
상천-상색(벌태봉역)-가평...
역홈엔 잡초가 무성하구요.
시멘트 경계석에는 마른 이끼가 잔뜩 끼었습니다.
그 아래 자갈돌에는 시꺼먼 기름 때가 자글자글하구요.
그러고 보면 상색역에서 가장 빛나는 건 역시 철쇠입니다.
굽은 등허리를 하얗게 까발린 채,
철쇠는 개미데미쪽으로 나란하게 사라집니다.
간이역도 아닌 임시역...
상색역엔 하루에 네 번 기차가 섭니다.
청량리로 가는 통근열차가 아침 여섯시반에 잠시 섰다 가구요.
낮에는 12시 완행열차가
경동시장에 나물팔러 가는 아줌마들을 태우고 서울로 떠납니다.
그리고 저녁엔 춘천으로 가는 기차가 상색역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데요.
우리가 기다리는 바로 그 6시 반 찹니다.
이따 8시 반쯤엔 막차가 상색역에 동네 사람들을 토해 낼 꺼구요.
세 평쯤이나 될까.
송판 건물은 상색역 중심에 버티고 있는데요.
지붕엔 작은 기와를 얹었고 벽에는 송판을 대충대충 둘렀습니다.
동쪽으로 낸 유리 창엔 먼지 얼룩이 가득한데...
"*옥아, 사랑해~"
유리창에도 누군가 낙서를 해 놨네요.
처마밑엔 거미줄이 치렁치렁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흙바닥 위에는 기다란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데요.
그 거죽에 칠했던 뼁끼가 들고 일어나서
파란색인지 흰색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와하하하, 니 궁뎅이좀 봐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용이 녀석이 벤치에서 일어서는 나를 보고 한바탕 웃어 제낍니다.
"엉덩이가 뭐 어때서..."
뼁기 조각들이 허벅지까지 희끗희끗하게 달라 붙었습니다.
"졸라게 토사리깠다. 니들 잡혀갔는 줄 알았는데..."
"너랑, 다신 안 논다. 의리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놈."
"야, 그럼 니들이랑 같이 잡혀 가는 게 좋았겠냐?
나라도 도망쳐서 니네 엄마한테 니들 잡혀갔다고 말해줘야 할 꺼 아녀?"
"됐어, 임마!"
"근데, 고부꾼 손수레 타 보니까 어때?"
"그거 정말 신기하더라. 손잡이 있잖아, 그게 삽자루 같이 생겼는데 그 아래쪽에 톱니바퀴가 달렸더라구."
고부꾼 손수레 자랑하느라 용이 녀석의 허물은 금방 잊혀졌습니다.
그리고 상색역에는 친척들 마중나온 동네 사람들이 와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뵈엑 뵉~!"
아마도 기차는 상천 굴깐을 빠져나와
운교대 모퉁이를 지나 오는 모양입니다.
'내 필통' 카테고리의 다른 글
031208 슬그머니 다녀간 발자욱들 (0) | 2010.09.28 |
---|---|
100108 조무락골과 어비계곡 (0) | 2010.09.15 |
100125 나의 맛 나의 색깔 (0) | 2010.09.14 |
070905 엄마의 편지 (0) | 2010.09.14 |
090615 오징어물총 (0) | 2010.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