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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필통

070905 엄마의 편지

우물가 배나무에서 매미소리 요란할 때

어머님이 채마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 오셨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으시더니

"종선아! 연필하고 편지지 가지고 이리 나와 봐라." 하신다.

텃밭에 나가 같이 김을 매자는 소리는 아니니 다행이다.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지난 봄 미군부대에서 얻어 온

노란색 두루마리를 선반에서 내렸다.

두루마리를 돌려 종이를 두뼘 정도 잡아 뺀 다음

30cm짜리 대나무 자를 눌렀다.

그 끄트머리가 시꺼멓게 탄 쪽에서 부터

종이를 잡아당겨 잘라 냈다.

그리고는 연필을 챙겨 마루로 나왔다.

 

"지금부터 에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써라."

"예, 빨랑 불러요."

이미 서너 차례
어머니의 편지를 대필했던 경험이 있었던 터,

나는 냉큼 연필 끝에 침을 뭍혔다.

"에~ 아버님전 상서."

"쓰고 있는 거여?"

"봐요? 벌써 다 썼잖아요."

먼산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그래, 맞아. 바야흐로..."

"바야흐로 중추가절에 기체후 일향 만강하옵시며..."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기냥, 부르는 대로 써. 이놈아!"

어머닌 그렇게 띄엄띄엄 편지 글을 불러 내려 갔다.

"다름이 아니오라 아버님, 제 자식 놈이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편지 글은 다름 아닌 내 얘기 였다.

막내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텃밭 농사로는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서울에 올라가 외할아버지 일을 돕겠다는 것이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영등포에서 커다란 양조장을 경영하시고 계셨다.

외할아버지를 도와 양조장에서 굳은 일이라도 하겠으니

내 등록금을 좀 마련해 달라는 것이 편지 글의 요지였다.

"엄마, 나 중학교 안 갈래."

"넌, 잠자코 있어. 엄마가 너 하나 중학교 못 가르칠 까봐 그래?"

"....."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몸 건강히 계십시오."

편지 글을 다 토해 낸 어머닌...

"휴우~"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 쉬곤 텃밭으로 나가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지난해 여름부터

어머닌 한숨이 부쩍 잦아졌다.

 

한달 쯤 지났을까?

가을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밤,

잉잉 거리는 문풍지 소리에 잠이 깼다.

어머니가 희미한 등불아래서 양말을 꿰메고 계시다.

늘 그랬던 것처럼

들릴듯 말듯 구슬픈 노래를 읊조리면서...

그날 난 기어이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등잔 불 그을음이 기다랗게 꼬리를 쳐들 때

어머닌 내 양말 뒷꿈치에 눈물을

"툭!" 떨어뜨리셨다.

하염없이 울고 계셨다.

행여 들킬 세라 울음을 삼키고 또 삼켰다.

 

며칠 후 어머닌,

옷가지 몇 개를 싸들고는 싸릿문을 나섰다.

"엄마가 한 달 정도 서울에 다녀올테니

동생 잘 돌보고 학교에도 빠지면 안된다."

"엄마, 나 중학교 안갈테니 엄마도 서울 가지 마라."

"이 녀석이 철딱서니 없게 왜 이래?"

어머닌 매정하게 돌아섰다.

아랫집 산수유 나무 밑을 지날 때

잠시 멈칫했던 것 말고는

저 멀리 철뚝까지 한 달음에 가셨다.

세 살 터울의 여동생과

기나긴 자취 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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