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지붕아래 ㄴ자로 지은 우리집엔 방이 3칸이었다.
부엌에 맞닿아 있는 안방, 굴뚝과 안방 사이에 있는 윗방, 그리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소죽 쑤는 큰 아궁이가
있었던 건넌방... 윗방은 겨울과 인연이 깊고 건넌방은 가을과 궁합이 맞았다.
먹을 것이 궁한 추운 겨울, 그래도 윗방에 가면 먹을 것이 좀 있었다. 고구마나 밤 같은 것들...
발을 두겹이나 세겹으로 둘러세워서 그 안에다 고구마를 넣어 보관했었다. 거기서 고구마를 꺼내다 화롯불에
구워 먹는 것으로 점심을 때워야 했었다. 그래서 윗방은 겨울 기억이 많은 곳이다.
반면 건넌방은 여름 기억이 많다. 마루와 뒤꼍으로 바람이 잘통하는 건넌방에서 종종 낮잠을 자곤 했다.
"이 녀석아 꼴베러 안가고 잠마느 퍼질러 자면 어떻게허냐?"
어머니 성화에 못이겨 부시시 눈을 뜨면 처마밑에 달려있는 큼지막한 뒤웅박 벌집이 보이던 곳.
논두렁이나 동산에 가서 꼴을 한짐 베어다가 건넌방 부뚜막에 걸쳐 놓으면 큰형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아라 했었다. 아직 늦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9월, 어머니는 건넌방 아궁이에 불쏘시개를 넣는다.
성냥불 그어 호호불며 불씨를 살린다. 바싹 마른 장작을 넣으면 금방 아궁이 하나 가득 후끈한 불길이 넘실댄다.
가을 누에 때문이다. 건넌방에서는 가을 누에가 자라고 있다.
누에는 네번 잠을 자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고치를 짓는다. 그리고 고치 속에서 또 한번 허물을 벗고는 번데기가 된다.
번데기에서 10일쯤 지나면 나방으로 바뀌어 고치를 뚫고 나온다.
고치를 짓기 직전의 누에를 익은 누에라고 하는데 몸속이 투명해진다. 실을 뽑아 고치를 지을 준비가 된 것이라고나 할까?
누에 섶을 만들어 잠박에 나란리 올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젓는 녀석 부터 섶으로 옮긴다.
이때 잠실을 따듯하게 해 줘야 누에들이 왕성하게 고치를 짓는다.
건넌방에 덕대를 만들고 잠실을 꾸몄지만 다섯살 누에들은 덩치도 크고 식욕도 왕성해서 때로는 안방에 까지
잠실이 꾸며지게 된다. 후끈한 방에서 덕대와 잠박을 천장삼아 잠을 청한다. 뽕잎 갉는 사각거리는 소리...
누에똥과 뽕잎이 만들어 내는 특유한 냄새...
어제 농어촌산업박람회에서 색깔 누에를 만났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어릴적 기억이 그 특유의 냄새때문에 생생하게 되살아 났다. 이틀만 더 먹이면 고치를 짓기 시작할 꺼라는 말에
냉큼 색깔 누에 몇마리를 얻을 수 없느냐고 뗴를 썼다.
보라색 누에는 보라색으로 고치를 짓고 파란 누에는 파란 고치를 짓는다고 했다. 그러면 염색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어릴적 산에서 가끔씩 초록색 고치를 발견하곤 좋아라 했었다. 산누에가 지은 고치다.
산누에를 집에서 키울 수 있다면 초록 명주실을 뽑을 수 있을 텐데...
흰 누에 2마리, 파란 녀석 2마리, 보라색 2마리, 모두 여섯 마리를 얻었다.
종이 상자에 담아와 베란다에 누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이 녀석들이 고치 짓는 모습을 딸들에게 보여 줘야 할텐데...
환경이 변해서 잘 살 수 있으려나? 혹시 아이들이 징그러워 하지나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침 무렵에 퇴근한 아내에게서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누에 한마리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징그러워서 도저히 못 만지겠으니 버리든지 빨리 와서 다른데로 옮기든지 하라며 소리를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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