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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의 역사

111003 헤이리 근현대사박물관


30여년전 난 남산아래 장충단 공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희미한 가로등아래로 촘촘한 계단을 내려와 자취방의 문을 열면
매케한 연탄불 냄새가 코를 찌른다.




서둘러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연탄 아궁이 위에 냄비를 얹는다.
그리고 불문을 열면 포르륵 냄비가 달아오른다.
라면을 끓인다. 비닐봉지에 덜어 먹는다. 설겆이하기 싫어서....




시큼한 김치는 어머니가 지난달말에 가져다 준 것.
냉장고는 물론 없었다.
그래도 라면에 김치만큼 어울리는 반찬이 또 있을까?




홀애비 냄새 풀풀나는 자취방에 들어서면 나를 반기는 낡은 기타.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주인집 아가씨가 가끔씩 들어주긴 했지만 실은 엄마가 그리워서 부르던 노래다.
그해 겨울 엄마는 교통사고로 졸지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부지한테 18살에 시집와서 가난하게 살았다.
아부지는 산판이나 광산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을 하셨다.
5남1녀를 낳으셨는데 나는 그중에 막내 아들이다.




아부지는 재주가 많은 동네 일꾼이셨다.
집을 짓는 곳에서는 벽돌공이자 미장공이셨고
해마다 명절때면 동네사람들 머리를 깍아 주셨다.
사진처럼 번듯한 이발관을 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기다란 자루가 달린 이발 기계로 내 머리를 잘라주셨다.
명절때는 박박머리가 아닌 상고머리로 단정하게 깍아 주셨다.



아부지는 열심히 일해서 안영가리 골자기에 제법 널찍한 농토를 샀다.
돌을 골라내고 밭을 갈았다. 콩을 심고 밀밭을 일궜다 한다.
하지만 그해 가을 미처 첫 수확을 마치기도 전에 군인들이 막무가내 아부지 농토를 갈아 엎었다.
그때는 군인들의 세상이었다.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군인들이
아부지가 20년 뼈 빠지게 일해서 얻은 농토에다 운전교육장을 만든 것이다.



사전에 동의를 구하거나 보상을 해준 것은 없다. 
아부지 논밭을 불도저로 막무가내 갈아 엎고 구불구불하게 길을 만들어 군용트럭들이 오르락내리락하게 했다.
군인들의 운전교육장이 돼버린 농토를 바라보며 아부지는 화병을 키웠다.
3년 병고 끝에 아부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되던 해 여름이다.



어머니는 아부지가 남기고 간 빚을 떠 안고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도 큰형과 둘째 형이 서울 외갓집에서 약간의 돈벌이를 시작했고 세째 형은 군에 입대했다.
네째 형도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갔다.


하지만 어머니와 형들은 나를 중학교에 보냈다.
막내인 나 만큼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하셨다.
가평 가이사중학교.
집에서 4km정도 춘천쪽으로 걸어야만 학교 정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중학교에 보내놓고 무진 고생을 하셨다. 봄 가을로 누에를 치셨다.
뽕밭도 없이 누에를 친다는 것은 고생보따리를 짊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열두봉째나 두밀 골자기에 가서 산뽕을 따와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여동생을 데리고 철뚝을 넘는다.
나는 앞에서 끌고 여동생은 뒤에서 리어카를 밀고 태봉마을 가로질러 독점으로 간다.
사슴목장을 지나 살강베르 개울가에서 어머니를 기다린다.

새밀 삼거리로 구부러진 흙길이 어둠속에 잠기고 사방은 고요한데
이제나 저제나 어머니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엄마가 산그늘에 뽕따러 가면 오뉘가 개울가에 기다리다가..."를 나지막히 불렀다. 
여동생 손을 꼬옥 쥔 채 호랑이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을 물리쳤다.


 
어머니가 나를 기어이 고등학교에 보낸 것은 모험이었다.
형들이 서울에서 돈벌이를 하긴 했지만 내 학비를 거들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큰형은 늦은 장가를 서둘러야 했고 둘째 형은 덜컥 폐병에 걸렸다.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닌 내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잡은 것은 요행이었다.
그것도 럭키금성그룹이라는 대기업에 취업한 것은 더더욱 그렇다.
서울역앞에 있었던 금성사 양동사옥에서 필기시험과 면접을 치렀다.



금성통신 기간사원양성과정. 거기서 일년동안 합숙하며 OJT교육을 받았다.
전문대학 과정이라고나 할까. 50여명의 입사동기들을 사귀었다. 
갱상도 보리문디도 있고 강원도 감자바위도 있었다.
전라도 거슥들과 충청도 촌놈들도 1년 동안 합숙하며 친구가 되었다.


금성통신은 전화교환기와 전화기 등 통신기기를 만들던 회사. 군납만으로도 짭짤한 수익을 내던 회사다.
몇몇 동기생들은  지지난해 거기서 근속 30주년을 맞았지만 나는 1985년 봄 금성통신을 퇴직했다.
남산밑에 자취방을 얻고 두문불출하며 8개월 정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해 겨울 어머니가 자취방에 오셔서 내게 말했다. "오늘이 네 생일이라 올라 왔다. 미역국은 먹었니?"
설을 나흘 앞두고 태어난 나는 늘 생일을 잊고 살아야 했었다.
여튼 어머니가 끓여 준 생일 미역국을 맛있게 먹고 어머니와 함께 창경원과 남산을 산책했다.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간다며 어머니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게 된 것을 사과했다.
"내 아들이 어떤 결정을 했더라도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 어머니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효자 노릇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자가 되고 싶었다. 28살에 대학 신입생이 되어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합격 소식을 전하던 다음 날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일주일동안 사경을 헤메던 끝에
기어이 저 세상으로 가셨다.
"엄마가 산그늘에 뽕따러어 가면..."